전북특별자치도의 남서부에 있는 매력적인 도시 정읍은 호남 5대 명산 중 하나인 내장산을 품고 있는 도시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외에도 정읍에는 천곡사지 칠층석탑, 무성서원, 피향정등 고대 역사의 흔적이 담긴 문화제들과 나라를 지켜내기 위해 독립운동가들의 흔적들도 많은 도시입니다. 이 포스팅에서는 대대로 내려오는 유적들과 나라를 독립시키려고 뜨거운 삶을 살았던 운동가들의 흔적을 살펴보겠습니다.
시간이 남긴 흔적
정읍은 깊은 역사의 도시로,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수많은 장소 중 하나는 내장산 국립공원에 위치한 아름다운 내장사입니다. 대단한 규모의 사찰은 아니지만 전국유명사찰 목록에서 빠지지 않는 아름다운 사찰로 정읍을 찾는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합니다. 속세와 불계를 나누는 문이기도 하며 경건함을 일깨워준다고 하는 내장사 일주문을 지나면 그 이름도 유명한 단풍나무들이 끝도 없이 줄지어 서있습니다.
108그루가 있다고 하는데 불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모든 고통 즉, 백팔번뇌에서 비롯됐다고 합니다. 사찰에 이르기 전 전망대, 까치봉, 신선봉, 용굴암 등의 이정표를 지나 내장사의 두 번째 문, 천왕문을 만납니다. 천왕문은 사천왕문이기도 하며 사천왕이 수미산 중턱에서 불법을 수하하듯 사찰에 악귀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한다는 바로 그 문입니다. 불교계에서는 중생들의 마음속에 있는 사념이나 잡념을 없애주는 역할도 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천왕문을 지나 또 하나의 문의 역할을 함께하는 정혜루, 그 앞에 자그마한 연못, 극락전과 관음전등 각각의 지점마다 장소에 관한 이야기들을 잘 알려주고 있어 내장사를 알아 가는데 많은 도움을 받습니다. 아름다운 자연 풍광에 더해 역사적 의미도 있는 곳이니 꼭 방문해 보길 바랍니다.
또 하나 정읍에서 가봐야 할 곳은 무성서원입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무성서원은 신라말 태사태수로 부임하여 8년간 선정을 베푼 고운 최치원 선생을 기리기 위해 생사당을 세운 데서 유래되었습니다. 처음 서원을 건립할 당시에는 태산서원이라 했는데 숙종 때 무성서원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자연 속에 입지한 다른 서원과는 다르게 마을 속에 위치하여 주민들이 민주적으로 서원의 보존과 운영에 참여해 왔다는 것이 큰 특징입니다.
무성서원은 1919세기말 정부의 서원철폐령에도 없어지지 않은 전라북도 내 유일한 서원으로 고운 최치원 선생, ‘상추곡’을 지은 불우헌 정극인 선생 등 이 지역에서 성리학을 보급하고 학문을 장려한 7인을 배향하고 있습니다. 특히 무성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향약인 ‘고현동향약’을 시행하였으며, 을사늑약 체결로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이에 항거하여 1906년 면암 최익현을 맹주로 호남 최초의 의병을 창의 한 역사적 현장으로 그 중요성을 인정받았습니다.
자유를 위한 시작
1894년 정읍에서 처음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은 우리나라 근대사에 있어 커다란 한 획을 그은 사건이었습니다. 직접적인 계기는 당시 고부군수였던 조병갑의 횡포였지만, 시대적인 상황으로 미루어 보면 봉건주의가 붕괴돼 가는 과정에서 부패한 정치세력과 외세에 항거한 운동이었으므로 그 의미가 더욱 깊습니다. 이 혁명은 근 1년 동안 전국 각지에서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는데 그 시발점이자 중심지가 바로 지금의 정읍입니다.
정읍시 태인천 제방에는 동학농민혁명의 원인이 되었던 만석보 유지비가 있습니다. 만석보는 조선 말기 보가 있었던 자리를 일컫는 말로 전라북도 기념물 제33호로 지정돼 있습니다. 만석보는 당시 마을에 살던 농민들이 세운 ‘보’입니다. 이 ‘보’ 덕에 가뭄이 아무리 심해도 흉년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고 하여 ‘만석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그런데 1892년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이 세금을 더 많이 거두기 위해 만석보 아래에 더 높은 새로운 보를 쌓아서 홍수가 나면 냇물이 넘치기 일쑤였습니다. 이로 인해 상류의 논들이 큰 피해를 입었고, 그런데도 조병갑은 보세를 감면하기는커녕 보세를 줄여달라는 농민들에게 매질을 했습니다. 이에 크게 분노한 농민들이 고부 관아를 점령하고 만석보를 헐어버렸습니다.
이 민란이 결국 동학농민혁명의 시초가 됐고 현재 이곳에 세워진 ‘만석보유지비’는 갑오 동학혁명 기념사업회가 세운 것입니다. 유지비는 여전히 불의 항거하던 선열들의 높은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의를 널리 알리고, 당시 농민군의 정신을 후대에 전하고자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기념관은 두 개의 상설전시실과 한 개의 기획전시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상설전시실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과정과 당시 농민군이 사용했던 무기, 생활용품, 전적류 등을 볼 수 있으며, 그 외에도 체험 공간과 어린이 전시실 등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또 기획전시실에서는 매년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기획 전시를 진행하기도 합니다. 기념관을 한 바퀴 돌아보고 나면, 농민군이 꿈꿨던 세상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정읍에는 또 다른 자유를 위해 독립의 길을 걸었던 백정기의사 기념관이 있습니다. 백정기의사의 이름은 다소 덜 알려져 있습니다. 백정기의사는 1896년 전라북도 부안에서 태어나, 19세에 3.1운동을 목격하고 고향에 내려가 항일 무장항쟁을 선도하였습니다. 독립운동 군자금 조달을 위해 힘쓰고, 일본 군사시설 파괴를 공작하다가 경찰에 구속됩니다. 당시 본적지와 행적을 속여 기적적으로 방면되고,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합니다. 그 후, 북경을 중심으로 이회영, 유자명, 이을규, 정화암, 신채호 등과 독립운동을 계속합니다. 1924년 일본 천왕을 암살하러 도쿄로 갔으나 실패하고, 그해 여름 일본 동경의 수력공사장, 주요 건물을 폭파하려고 준비했으나 다시 북경으로 귀환합니다. 1932년 상하이에 자유혁명자연맹을 조직하고 이를 흑색공포단으로 개칭 조직을 강화하여 대일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1933년 3월 일본 주중대사인 아리요시를 처단하러 ‘육삼정’에 갔으나, 당시 계획이 누설되어 그 자리에서 잡힙니다. 일본 나가사키법원에서 무기형을 선고받고, 1934년 6월 5일 옥중에서 38년의 짧은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백정기의사는 효창공원 의사묘역에 안장되었으며, 백정기의사의 고택이 있는 정읍시 영원면에 의사의 기념관이 있습니다. 입구에서 조금 걸어가면 광장이 보이는데 광장 한가운데에는 백정기의사의 동상이 있습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사서삼경을 통달할 정도로 영특한 청년이었던 백정기의사의 기백이 느껴집니다. 기념관 내부에는 구파 백정기의사의 유품과 활동상을 보여주는 패널, 디어로마가 있으며 기념관 주변에는 어록비와 백정기의사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 건물이 있습니다. 독립을 향한 백정기의사의 정신과 얼을 발전시켜 나갈 공간인 백정기의사 기념관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이름 없이 독립을 위해 싸워왔던 선조들의 모습을 회상해 볼 수 있는 장소가 될 것입니다.
역사의 기억
정읍에서는 매년 5월에 열리는 황토현 동학농민혁명 기념 축제가 열립니다. 동학농민군의 역사와 문화를 기리고 기념하는 행사로, 매회 다채로운 프로그램과 이벤트가 펼쳐집니다. 이 행사는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역사를 기념하고 전통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동학농민군의 흔적을 살펴보고 그들의 투지와 열정을 되새기며 우리의 역사와 정체성을 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기도 합니다. 이 축제는 전라북도 지역뿐만 아니라 전 국민의 많은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현충포 기념관에서 시작되는 경축식은 다양한 예술 행사와 전통 공연, 그리고 발차기 재현 행렬과 기념사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한마디로 정읍은 아름다운 자연과 고택, 역사가 어우러진 도시입니다. 과거 많은 사람들이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웠기에 지금 우리는 평온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정읍의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자연을 즐기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우리 선조들의 숨결을 느껴보시길 바랍니다.